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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Novel)/공사장 로맨스

[공사장 로맨스] 5화 - 빛은 소리보다 빠르다.

 세아씨와 대화하는 동안 세아씨에 대해서 많이 알았다. 운동, 드라마, 낮보다는 밤에 걷는 것, 강아지보다는 고양이.

그렇지만 세아씨와 연락하면서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바로 어느 정도 시간이 늦으면 세아씨의 메시지를 잃지 않았다.

사실, 세아씨와 굿나잇 인사를 하게 되면 그대로 끝날까 봐 생기는 불안증세에서 나온 것이다. 일상적인 대화와 가벼운 고민을 주고받는 게 일상이다. 그래서 느껴지는 그런 직감이 있다. 세아씨에게 잘 자요 라는 인사를 하고 다음 날 아침이 됐을 때 연락이 오지 않을 것 같았고 내가 하려고자 하는 용기도 없었다. 세아씨에게 부담을 주는 것 같고 지금 내가 원하는 건 그저 세아씨 옆에 있는 좋은 친구이길 원한다.

 몇 개월전, 여자 친구는 다른 남자가 생겼다고 나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빛은 소리보다 빠르다. 그녀가 이별을 말하기 전에 눈빛으로 느낄 수 있었다. 2년 연애의 끝은 생각보다 화가 나지도 충격을 받지도 않았다. 이미 다른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 친구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응원밖에 없었다. 여자 친구와 나는 이미 대화가 줄어있었고 서로에 관심도 떨어지던 시기였다. 단지 우리 둘은 너무 닮아서 연애했고 그게 너무 닮아서 우리 서로 헤어지자고 말할 수가 없었다. 헤어져있지만 연애하고 있는 그런 사이가 그 당시의 우리다.

 싸우지 않고 헤어지는 연인이 있을까? 있다. 이별은 사소한 것이 쌓여서 찾아온다. 사소하게 마음에 쌓여왔던 것들이 불만을 얘기하지 못하고 천천히 서로를 갈라서게 만든다. 큰 잘못을 해서 헤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사실 누군가 진심어린 사과를 한다면 다시 이어지는 경우를 많이 봤다. 나는 이 사소함이 쌓여서 그녀와 헤어짐을 눈치채고 있었다. 애써 외면했을 뿐이지만 이 깨달음을 얻었으니 나는 이별을 통해 성숙해졌다고 믿으며 그리움은 남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세아씨, 이번 주말에 서울에 결혼식이 있어서요. 금요일이나 토요일에 만날까요?"

"토요일 저녁에 만날까요? 금요일에는 제가 약속이 있어요."

"네 먹고 싶은 건 있어요? 저는 진짜로 뭐든 잘 먹을 자신이 있어가지고요!"

"오 저 마침 땡기는 게 있긴 했거든요. 그거는 제가 만나면 말씀드릴게요. 궁금하죠?"

"어 나 궁금한 거 있으면 잠 못 자거든요. 오늘이 지나면 세아씨를 미워할 수도 있어요. 크크"

"그럴 일 없을 것 같은데요~ 힌트는 매운 거예요! 혹시 못 먹나요?"

"아니에요. 듣기만 해도 침 고이는 게 엄청 잘 먹어요!"

"좋아요. 토요일에 봐요~ 세울씨는 뭐 하고 있어요?"

 

 하루 그리고 이틀, 여전히 굿나잇 인사는 없는 자연스럽게 이어가는 다음 멘트들로 시간을 보내면서 인상을 남기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고 있었다. 결국엔 도움이 필요해서 유미에게 연락하고 유미랑 우리 집 사이의 자주 보는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은은한 작은 조명들과 푹신한 의자, 커피 창고 느낌을 지녔지만 작은 카페인 우리 아지트는 유일하게 유미가 눈치 보며 조용히 얘기하는 곳이다.

 

"오빠, 애야? 뭐 맨날 스무디, 에이드 언제 클래? 어른이란 자고로 아메리카노야"

"임팩트가 필요해 유미야."

"임팩트? 임팩트가 뭐야?"

"그 저번엔 얘기한 여자 있잖아. 아직까지 연락하기는 하거든 근데 뭔가 제대로 마음 깊게 들어가질 못 하겠어."

"그거 그냥 오빠가 딱 그런 사람이라 그래, 편한 남자"

"내가 너한테 대하는 모습이랑은 달라. 편견 아니야?"

"편견? 니가 니한테 지금 부정하고 있는 게 편견이고 자식아. 학과 동기 여자애들은 다 그래 오빠는 편한 사람이야.

여자들 중에 딱 오빠 같은 사람을 찾아다니는 사람 아니면 오빠가 좋아할 때 보내는 신호 절대 눈치 못 채.

그런 사람 있잖아 초면에 팡하고 터지는 사람이랑 내가 얘랑 지금 썸 타는 게 맞을까? 생각하는 중에 팡 터뜨리는 사람.

근데 오빠는 둘 다 아니야. 그냥 뭐야? 얘가 나 좋아했어? 딱 진짜로 딱, 딱, 이 정도야."

"음 맞는 것 같아 그러면 나 어떻게 해야 팡하고 터뜨릴 수 있을까?"

"그건 모르지. 사람은 다 한 명도 빠짐없이 다 달라서 사람이야. 오빠는 결국 그냥 잔잔한 사람이지."

"그러면 내가 잔잔한 줄 알았지? 이러다가 막 파도쳐볼까?"

"오빠는 바다가 아니야, 그냥 저기 저수지에 있는 뭐 그런 파도가 아니라 파동조차 없는 잔잔한 저수지야."

"유미야, 나가. 나가서 나중에 시간 되면 천벌 받아주라."

"응 고마워 오빠도 하는 일 다 실패하고 매일매일 주저앉아서 울고 있었으면 좋겠어."

 

 결국 큰 소득도 없고 세아씨에게는 제대로 얘기를 꺼내지도 못한 채 금요일은 지나가고 토요일, 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탔다. 옷은 어떻게 입어야 자연스럽고 첫 인사는 어떻게 해야하고,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까부터 밀려드는 고민 속에서도 얼른 세아씨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버스터미널에 도착하고 세아씨가 말했던 곳으로 택시를 탔다. 택시에 내려서 세아씨에게 전화를 했을 때 세아씨를 찾을 수 있었다. 내가 했던 고민은 별게 아닌 듯 세아씨는 정말 오랜만에 보는 친구처럼 반겨주었고 자연스럽게 웃음이 나왔다.

 "메뉴는 짜잔 닭볶음탕"이라고 세아씨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식당을 소개했다. 블로그의 리뷰는 어느 정도인지 자기 친구들이랑 얼마나 여기를 자주 찾아왔고 어떻게 먹어야 정말 맛있다고 알려주고 있었다. 그러는 중에 나는 세아씨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생겼다.

 

"이번 주 많이 힘들었어요?"

 

그러자 의아하게 쳐다보는 세아씨의 그 눈빛은 알 수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역시 빛은 소리보다 빠르다.

 

"네, 엄청요. 엄청 엄청 엄청 진짜로 힘들었어요."

"들어봐도 돼요? 나 고민 들어주는 거 잘하는데."

"우리 이번에는 맥주 마실까요?"